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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왈츠의 왕' 요한 시트라우스!

by 로사샘 2023.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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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없는 사랑의 무대가 된 마이야링의 마을

 

 

'왈츠의 왕' 요한 시트라우스!

 

비인에서 왈츠란 무도 곡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말엽입니다. 

당시 왈츠 작곡가로 비인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던 사람은 요제프 라너와 왈츠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요한 1세 였습니다.

 

라너와 요한 1세는 10대때에 미하엘 파머의 댄스 밴드에 입단하여 서로 알게 되었는데, 1819년에 이 악단에서 나와 자기들의 악단을 여조직했습니다.

 

그 무렵의 왈츠는 8마디의 멜로디를 고작해야 2~3개 번갈아 되풀이 해서 연주하는 단순하고 원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 두 사람은 종래와는 다른 수준이 높은 왈츠를  만들어 인기를 높여 갔습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헤어져 각기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작곡과 연주에서 경쟁하게 된 것은 1825년 일입니다.

 

이후 라너는 궁정 무도 악장으로 취임하는 등 비인을 중심으로 활약하면서 왈츠 '결판룬의 사람들' 등과 같은 명곡을 남겼습니다.

 

한편, 요한 1세는 비인뿐 아니라 파리나 런던 등 유럽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여 국외에도 왈츠를 유행시켰으며, 왈츠 "로렐라이 - 라인의 노래" "라데쓰키 행진곡" 등의 명작을 남겼읍니다.

요한 1세의 장남으로 태어난 요한 2 세는 동생 요제프 에두아르트와 함께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으며, 아 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음악적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요한 세는 자식들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업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요한 2세는 어머니 안나의 이해와 도움으로 몰래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했으며, 반대하는 아버지와 부자의 인연을 끊는 한이 있어도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1844년 10월에 자기 악단을 결성하여 데뷔했으며, 이로부터 아버지 요한 1세의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하여 서로 인기를 다투게 되었습니다.

 

요한 2세의 초기 작품에는 아버지 요한 1세나, 특히 라너 등의 영향이 짙게 남아 있었습니다.

 

1849년에 아버지가 죽자, 그 오케스트라도 흡수 합병함으로써 서서히 자기의 독자적인 작품을 확립해 갔습니다.

 

1852년에 작곡된 "사랑의 노래" 등은 상당히 진전을 보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무렵, 요한 Ⅱ 세는 눈코 뜰 새가 없이 바빴는데, 매일 밤 2~3개 의무도 회장에서 겹치기 연주를 하고, 낮에는 작곡과 오케스트라 연습. 일요일에는 명곡 콘서트에 정기적으로 출연하는 외에 국외로 연주 여행도 했습니다.

 

이미 엔지니어로 자리를 굳힌 요제프가 형 요한 2세의 이런 바쁜 생활을 보다 못해서 음악가로 전향한 것은 1853년이며, 외교관을 지망하고 있던  에두아르트가 음악가로서 데뷔한 것은 1859년이었습니다.

 

두 동생과 일을 분담해서 하게 되자, 여유가 생긴 요한Ⅱ 세는 바야흐로 왈츠의 왕다운 작품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가속도 원무곡", "아침 신문", "비인의 봉봉",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예술가의 생애.""비인 숲 속의 이야기", "술, 여자, 노래", "인생의 기쁨" 등 일련의 명곡이 1866년부터 70 년 사이에 완성되었습니다.

 

요한 Ⅱ세가 오페레타를 작곡하게 된 것은 1870년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좋은 이해자였던 어머니와 동생 요제프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충격을 받은 그는 무도 음악의 창작 활동을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시트라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 명예로운 궁정 무도회 악장의 지위를 동생 에두아르트에게 물리 준 그는, 마음의 상처가 차차 가라앉자 창작 활동을 재개했는데, 왈츠가 아니라 감상하는 음악으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1871년에 초연된 최초의 오페레다"인디고와 40명의 도둑"은 그리 뛰어난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의 명성에 힘입어 왜 인기를 모았습니다.

 

이어 "로마의 사육제 1874 년 이후 오늘날에도 자주 상연되는 유명한 "박쥐"가 탄생되었습니다. 

 

그 이후 "비인의 카리오스트로". "메두잔렙 왕자", "술래잡기", "여왕의 레이스 손수건", "유쾌한 전쟁", "베네치아의 하룻밤"그리고 유명한 "집시 남작"이 연이어 태어났습니다

 

이 동안에 왈츠 등의 무도 전혀 삭막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비인 기질", "레몬꽃 피는 곳", "봄의 소리", "아름다운 5 윈 "남국의 장미"."보석의 왈츠" 등도 함께 완성되었습니다.

 

1872년에는 미국으로 연주 여행하이 큰 인기를 모았으며, "헤럴드 왈츠"를 미국인에게 선물했습니다.

1886 년 이후에도 오페레타나 가극"기사 파츠만" 혹은 미완성곡으로 끝난 발레 음악 등의 무대 작품을 계속 쓰는 한편, "비인의 아가씨". "황제 원무 곡", "동양 이야기" 등 감상에 어울리는 왈츠를 작곡했습니다.

 

" 라이문트 시대의 추억"은 그가 죽기 전 해인 1898년에 작곡되었는데, 이것은 완성된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습니다.

시트라우스 집안, 특히 왈츠의 왕요한 Ⅱ세의 작품은 19세기 사람들을 춤추게 하여 즐거움을 안겨준 대중적인 음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다른 유행 작곡가들과 다른 것은 그 속에 시대를 초월한 예술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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