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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생생하고 정열적인 극음악의 비제!

by 로사샘 2023.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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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유적이 산재해 있는 아르르시가

 

 

생생하고 정열적인 극음악의 비제!

1838년 10월 25일, 가난한 성악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비제는, 36세라는 짧은 일생을 심한 가난 속에서 고통스럽게 생애를 보내었습니다.

비제는 비교적 음악적인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이 비상했었습니다.

4세 때부터 음악교육을 받았으며 신동으로 유명했던 생상보다 3살 이나 앞선 10세로 파리 음악원에 입학했으니 비제의 재주를 알만합니다.

파리 음악원에서의 비제의 성적은 상당했고, 몇 개의 상도 탔읍니다.

1857년에 로마대상을 획득하여 이듬해 로마에 유학했읍니다.

3년간의 유학을 마친 비제는 파리로 돌아왔으나 신통한 활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생활에 쪼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먹고살기 위해 피아노 개인교수와 명곡이나 가곡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해서 팔아 치우느라고 정신 차릴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무렵 비제에게는 신나는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즉 다레브스키 백작이라는 음악애호가가 10만 프랑을 쾌척, 이 돈을 기금으로 하여 매년 1명씩, 젊은 무명의 작가로 하여금 3막 오페라를 발표할 수 있도록 제의한 것입니다.

 

이 제안을 받은 카르발로라는 극장 지배인은 비제의 비범한 재주를 눈여겨 왔기 때문에 1차로 비제를 지목했던 것입니다.

이때, 내놓은 작품이 "진주잡이(Les Pecheurs de Perles)"라는 3막 오페라입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25세였습니다.

1863 년에 초연된 이 작품은 무려 18회라는 폭발적인 흥행기록을 수립하는 대 인기였습니다. 특히 이 오페라 중의 아리아 "로맨스"는 사람의 입에 회자하는 명곡으로 애호를 받아오고 있습니다.

비제를 얘기할 때 그의 단 1곡의 교향곡 C장조교향곡에 대한 것을 뺄 수는 없습니다.

 

이 곡은 비제가 17세 때인 파리음악원 학생시절의 습작품으로 시도된 것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1875 년 비제가 사망한 뒤로부터 무려 60여 년 뒤인 1935년 2월 26일 바인가르트너 지휘로 스위스 바젤에서 초연되었으며, 그의 조국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된 것은 이듬해인 1936년 6월 샤를르 민슈의 지휘로 파리교향악단이 연주했었습니다.

 

 비제가 죽은 뒤 이 곡은 파리음악원의 도서관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파묻혀 있다가 평론가 산타버스에 의해 비로소 초고가 발견되었습니다. 

 

물론 이 곡은 어린 학생시절의 습작품에 불과하므로 뒤의 그의 오페라들에 비해 미숙하고 선배들의 영향이 뚜렷하지만 로코코풍의 우아함과 남구풍의 경쾌한 정조를 베에토벤적인 완고하고 엄격한 고전적인 형식으로 잡아매어 비제의 독특한 개성이 잘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큰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1867 년 월터 스코트의 소설에 의한 오페라 "아름다운 퍼드의 처녀 (La Jolie fill de Perth)"를 발표했으나 결과는 신통하지 못했습니다. 

 

비제는 가난을 가난에서 벗지 못해 고통스런 생활을 누렸으나 1869년에는 알레뷔와 결혼을 했읍니다. 

 

이 해 교향악적 환상곡 "로마의 추억 (Souvenirs de Rome )"을 발표했지만 역시 별 관심을 끌지 못했읍니다.

1872년 1 막가극 "자밀레 (Djamileh를 발표하여 4회의 흥행을 보았고, 이해 “아를르의 여인 L'Arlésienne )”의 무대음악을 청탁받고 27 곡으로 된 극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이것은 연극보다도 비제의 음악이 호평을 받았고, 2집으로 된 모음곡 “아를르의 여인"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아를르는 프랑스의 남부 프로방스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로 강렬한 태양과 아름다운 풍경으로 이름난 곳입니다.

1874년 서곡 "파트리 ( Patrie )”를 발표한 그는 이어서 피아노 연탄곡집 "아이들의 놀이 (Teux d'Enfrants )”를 내놓았습니다.

72 년에 내놓은 희가극 "자밀레'로 오페라 코믹좌와 관련을 맺었던 덕분에 비제는 행운을 잡게 되었습니다.

오페라 코믹의 극장 감독인 드루반과 드로클로부터 3막짜리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입니다.

비제는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원작소설 "카르멘(Carmen)”을 알레뷔와 메이야크의 대본으로 극화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오페라 “카르멘"은 이듬해인 1875년 3월 3일 초연을 보게 되어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오페라는 등장인물에 대한 정확한 표현과 구성의 치밀함으로 작곡기법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 주어 19세기 오페라계에 큰 업적을 남겼던 것입니다.

오랫동안의 가난한 생활에 지친 비제는 1875년 7월 2일 파리 근교의 브자지발에서 운명했습니다.

 

 36세에 불과한 젊은 나이로 홀연히 떠난 그는, 나이에 부끄럽지 않게 위대한 자취를 남기고 갔습니다.

그의 음악은 대단히 참신하며 대위법과 화성, 관현악법 등의 구사에 있어서 당시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또한 음악에 지방색 을 도입한 점에서도 퍽 흥미롭습니다.

우선 “아를르의 여인"에서는 그곳의 민요를 채집하여 적절하게 안배했으며, “카르멘”에서는 정열과 화려함을 여지없이 구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묘한 대조를 이루기도 합니다. 비제도 모든 낭만주의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개성의 해방을 갈망하는 자유분방한 정열과 구질서의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는 젊은 지식인이었습니다.

이렇게 코즈모폴리턴 한 그가 대부분의 작품 소재를 지방에서 구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제는 “아를르의 여인"에서 남불의 프로방스인이 되었고, “카르멘”으로서 스페인 사람이 되었다 해도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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