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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고전파 음악

by 로사샘 2023.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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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2세

 

 

클래식 뮤직이란

클래식 뮤직(Classic Music)은 고전음악 또는 고전주의 음악, 고전파 음악이라고 하는데, 이 용어는 고정 개념을 가진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세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첫째는 시대적으로 보아 먼 옛날 음악이란 뜻으로 사용되는 것이며, 둘째는 시대 구분 없이 건전하고 예술성 높은 음악이면 모두 클래식 뮤직이라고 하고, 셋째는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을 둘러싼 빈 고전음악파들의 음악,즉 바흐가 타계한 1750 년부터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1827년까지의 음악을 가리키는 것이다.

용어가 이처럼 다의적인 것은 하이든, 모차르트·베토벤시대 고전파 음악들이 옛 그리스·로마의 문화를 동경하여 그 음악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노력하였고, 그 결과 그리스·로마 문화의 특징인 조화 · 균형 · 명석 · 단순·질서라는 건전한 요소를 음악에 충분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사에 있어서는 항상 세 번째의 의미로 쓰이게 된다. 그러나 그 외의 경우, 예컨대 대중음악(PopularMusic)과의 상대적 개념으로 사용될 때는 둘째 번의 의미로 쓰이게 되며 그때그때의 정황과 풍기는 뉘앙스에 따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고전파 음악의 특징

고전파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음악에서 질서의 미를찾고자 한 데 있다. 음악적인 질서의 미는 형식의 확립을 뜻한다. 

 

그래서 고전파들이 확립한 형식은 철저하고 완벽하여 뒤에 오는 낭만파 시대에도 답습하지 않을 수 없어론도 형식, 변주곡 형식으로 나타났고, 특히 소나타 형식은 '다양성에 있어서의 통일성이라는 지고한 음악미를 구축하였다.

악곡의 구성에 있어서는 바로크 시대의 성적(多)대위법을 외면하고 화성적단음악을 구축했다.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이나 <브란덴부르크협주곡> 같은 중압적이고도 복잡한 형식을 피하고 간결 명료한 화성적 단음악을 선호했다. 

 

따라서 음악의 본질을멜로디에 둠으로써 각자의 개성과 희로애락의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게 되었다. 고전파 시대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음악의 보편성과 세계를 들지 않을 수없다. 

 

고전파 음악가들은 각자의 혈통과 국가와 언어를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굳이 강조하거나 내세우려 하지 않고 만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지닌 예술, 인간의 예술, 인류의 예술을 추구하려 하였다. 

 

인간은 특정한 민족·국가의 구성원이기 전에 하나의 인간 공동체의 일원이므로 세계 공통적인 예술, 보편적인 예술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은 중세를 풍미하던 세계주의적 사상과 합치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엔 세계주의가 시대사조로서 정치 · 문화·사회 등에 확산되어 있었다.

 

비근한 예로 독일의 공주인 카타리나 2세가 러시아 황제가되었다든가, 독일에서 태어난 헨델이 로마에서 오페라를 배우고 런던에서 활동하다가 일생을 마친 것처럼 민족·국가를 초월하는 예가 흔했었다.

 



고전파 시대의 빈의 모습

고전파 시대의 빈에는 음악을 애호하는 풍조가 있었다.일반적으로 문화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는 의식이 높았으므로 문화의 꽃인 음악을 생활화하려는 습성이 있었다. 

 

특히 황족 · 귀족, 그리고이 자신의 품위와현시를 위하여 음악에 대한당시 황실이나 귀족들의 두 번씩의 음악회가 열렸으나 공원, 하다못해 음식- 일주일에 평균 좋은 야외음악당거리에서까지 도 음악회가 열렸다.

황실과 귀족들의 궁정엔 오케스트라나 실내악단이 있었다. 이들은 보통 30~40명으로 구성된 악단으로서 규모에 있어 그다지 작다고는 말할 수 없었는데, 그들은 연주를 하는 외에 하인이 하는 일도 같이 겸하였고 보수는 높았다.

음악인들은 궁정, 교회 등에 고용되어 보수를 받거나음악회에 출연하여 출연료를 받기도 하였지만 개인 레슨으로 생활할 수도 있었다. 

 

그때의 빈은 산업의 발달로 중산층이 부유해지면서 가정마다 피아노를 갖추고 있었고, 대중을 상대로 한 극장도 여러 군데여서 그런대로 흥행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인쇄술의 발달과 출판업의 성행으로 출판사들로부터 악곡 출판에 따른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빈이 음악도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스트리아라는 대제국의 수도여서 정치·경제 · 문화상의 중심권에 있었다는점과 지리적으로도 유럽의 여러 나라를 잇는 교통·교역의 중심지였다는 점, 또한 역사적으로도 레오폴드 1세(재위 1658~1705), 요제프 1세(재위 1705∼1711), 카를 6세(재위 1711~1740) 등의 여러 황제들이 스스로 작곡을 하거나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음악 진흥에 힘을 써 왔던 데도 원인이 있었다.

그리고 빈이 세계의 음악 수도로서 더욱 공고해 지고,모차르트·베토벤 슈베르트와 깊은 역사적 인물들을 배출해 낸 것은 마리아 테레(1740~1780)의 영위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래을 격파하고 새로운 제도를 수립하면서 국밤에 큰 공적을 쌓은 여걸로 예술감각에도 뛰어나 빈을 예술의 도시로 승화시켰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 요제프 2 세도 또한 개혁적인 계몽 전제군주이면서 음악에 조예가 깊어 스스로 성악과 첼로와 작곡을 하는 제왕이었다.

어떻든 빈은 게르만 민족, 라틴 민족, 슬라브 민족이함께 어울려 예술을 창출하던 음악의 도시, 음악의 세계수도였다. 그래서 하이든 로라우에서 이곳으로 왔고, 모차르트도 잘츠부르크로부터 왔으며 베토벤도 본에서 왔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빈 악파를 형성했다.

빈 고전파 음악의 거두는 물론 이들 세 사람, 하이든과모차르트, 베토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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