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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베토벤의 연인

by 로사샘 2023.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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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생애 3

 

불멸의 연인

베토벤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여성을 사랑한 숫자만 해도 그의 작곡 수만큼 될 것이란 설이 있을 정도로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아갔다. 

 

그의 생애에 결혼문제로 심각했던 여성만도 자그만치 열 명이 넘는다. 줄리에 귀차르디 (1801년 31세 때 교제), 요 제피네 브룬스빅(1804~6,34~36), 테레제 브룬스빅 (1804~6,3~36), 마리아 에르 되디 (1807∼17,37~47), 베티나브렌타노(1810∼12,40∼42), 테레제 말 파니 (1810) 40), 아말리 제발트(1811~12, 41~42), 도르데 아 어르만(1803~20,33∼50) 등등..……….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 14 번 op. 27의 2(월)를 줄리에타 귀차르디에게, op.78 인 피아노 소나타 24번(테레제를 위하여)을 테레제 브룬스빅에게 헌정했다.

베토벤이 이런 여성들을 깊이 사모하면서도 결혼을 하지 못한 것은, 그 여성들이 대부분 귀족 출신이어서 신분상의 차이가 문제되었고, 불치의 귓병에 그 원인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날 때에 그의 캐비넷 비밀 서랍 속에서 발송되지 않은 연애편지 세 통이 발견되어 두고두고 화제에 오르고 있다.

 

이 편지에 '내 불멸의 연인이여' 란 귀절이 있어 '불멸의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로 지칭하고 있지만, 받을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고 또 '7월 6일 아침' '7월 7일 아침 "7월 7일 월요일 밤'이라고만 적혀 있을 뿐 몇 년 몇 월인가를 명시하지 않아 과연 불멸의 연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 수수께끼로 등장했고, 편지 내용이 열렬한 사랑을 호소하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이 편지가 발견된 후, 수많은 전기작가들이 위대한 학설, 위대한 발견이라도 되는 듯 편지를 철두철미 분석 연구하고, 그와 관련된 온갖 기록을 찾아 헤맸다.

그의 개인 비서였던 신들러는 그 편지의 주인공이 귀차르디라고 주장했지만 그보다는 메이나드 솔로몬이란 사람이 과학적인 연구를 하여 신빙성이 더 높게 평가되고 있다. 

 

솔로몬은 베토벤이 연애할 만한 시기 중에 7월 6일이월요일인 날을 찾아내는 등 추리소설 쓰듯 논리를 전개해안토니 브렌타노 란 여인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브렌타노는 거상의 부인으로 베토벤을 우상으로생각하여 몹시 사랑하고 있었으나 베토벤은 그의 가정을 파괴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녀를 멀리했다고 한다.



하일리겐시타트의 유서

베토벤은 원래 건강한 몸이었으나 20대 후반부터 귓병이 발병, 불행이 다가왔다.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는의사들도 본인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선천성, 소화기장애, 티브스, 류머티즘 등 그 어느 것도 짐작이 가지 않은 원인에 의해 26세 때부터 외부의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기 시작하더니 32세 때인 1802 년경에 거의 들리지 않았고, 1820년경부터는 아주 세상의 소리에서 절연되고 말았다.

 

그동안 나팔 모양의 보청기를 사용해 보았으나 1810년경부터는 그것도 효과가 없어필담 하기을 시작했다. 필담 방식은 상대가 물어볼 말을 글로 쓰고 베토벤이 그것을 읽은 후 대답을 하는 것이다.

 

이 필담첩은 1819년부터 27년까지 사용된 것만도 138권으로 지금도 베를린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어쨌거나 음악가에게 있어서 난청 현상이란 흡사 화가가 실명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것이어서 그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베토벤이 유서를 쓴 집

처음에 베토벤은 자신의 병이 외부에 알려질까 봐 사람들을 피하고 가까운 사람에게까지 이 사실을 숨겨가면서 치료를 받았고, 교외로 나가 시골에서 정양을 하는 일이 많았다.

1800년 이후엔 하일리젠시타트 지방에서 여름을 보내며 귓병을 치료하던 중 자신을 비관하며 자결까지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때의 심경을 동생들 앞으로 글을 써 놓아 그의 사후 불멸의 여인에게 보낸 편지와 함께 발견되었으니 이것이 저 유명한 '하일리겐시타트의 유서'이다. 우선 이 유서를 일별해 보자.

『오, 너희들은 나를 적의에 차 있는 염세주의자라고 한다. 그것이 잘못된 태도라는 것을 모르는구나. 어려선 나도 따뜻한 감정과 선행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6년 전부터 내가 얼마나 절망적이었던가를.

 

정열과 생기는 사람들을 멀리하는 때문에 고독으로 바뀌고, 귀는 더욱 악화되어 절망은 두 배로 커지고, 아아, 어느 누구보다 완벽하여야 할 나의 청각이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을 정도로 변해 버렸으니 세상 사람들의 오해와 고독은 나에게 이중의 고통이다.

 

마치 추방당한 자의 심경이구나. 사람들이 내 병을 눈치채지 않을까. 두려움이 앞선다.

옆에서 들려오는 피리소리, 목동의 노랫소리도 듣지를 못하니 사람들 앞이라면 얼마나 굴욕스런 것이냐

나는 이런 경우를 당하여 내 목숨을 스스로 끊으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을 만류한 것은 오직 '예술'이었다. 아, 나는 내 안에서 느끼는 모든 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 나는 그때까지는 세상을 떠날 수 없다.(중략)

오 신의 섭리여, 하루 만이라도 나에게 환희의 순간을 주소서.

                          1802년 10월 6일 하일리겐시타트에서 루드비히 반 베토벤

 

이렇게 유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베토벤은 자살의 유혹을 훌륭히 극복하고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정열을 예술을 창조하는 데 모두 쏟아부었다. 

 

나약한 사람 같으면 파멸하고 말았겠지만 베토벤은 그의 말 "나는 운 목을 비틀어 버리고 말겠다" 처럼 괴롭게 다가오는 운명을 영웅적으로 극복해 내고 위대한 환희를 창조해 냈다.

이렇게 많은 걸작을 완성해 가면서 점차 베토벤은 허약해 갔다. 과로한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외에 가정적인 마음의 상처도 있었다.

동생 칼이 1815 년에 요절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외아들 칼(同名)의 후견인이 되었는데, 그의 모친이 이에 응하지 않음에 따라 4 년 동안이나 소송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소송은 승리했지만 칼이 학업을 게을리하고 행실이 나빠 늘 속을 썩여 오다가 1825 년 가을엔 대학까지 그만두고 그다음 해 빚 때문에 권총자살 소동을 벌여 베토벤은 크나큰 심적 타격을 받았다.

칼의 자살 소동은 급소를 벗어나 겨우 목숨을 건졌기때문에 베토벤은 그해 가을 칼을 데리고 기분 전환을 시키고자 또 다른 동생인 요한이 사는 도나우강 상류로 갔다. 요한은 저택을 마련,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2개월을 칼과 함께 묵었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생활이 끝난 어느 추운 겨울날 우유마차를 타고 빈으로 돌아오던 중 병을 얻어 눕게 되었다. 그리고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다음 해인 1827년 3월 26일에 위대한 악성 베토벤은 5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유럽 각국의 음악인들을 비롯, 2만 명이 넘는 조객이 참석하여 애도하는 속에 성대히 거행되었다. 그의 무덤은 빈의 중앙묘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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