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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피아노의 시인 쇼팽의 생애

by 로사샘 2023.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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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초상화

 

쇼팽의 생애

 천재인 프리드릭 프란치적 쇼팽(Fryderyk Franciszek Chopin)은 1810년 2월 22일,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은 프랑스 태생으로 바르샤바에서 28 마일 떨어진 제라소비 볼라 지방의 영주 수카르백 백작집의 프랑스어 교사였고, 어머니 유스티나 그 지자노프스카는 백작부인과 먼 친척인 귀족 출신으로 백작집의 가정부로 있었다.

 

따라서 쇼팽의 출생지는 엄밀히 따지면 제라소바 볼라의 스카르벡 백작집인 것이다.

쇼팽은 위로 누님 하나와 아래로 누이동생 둘을 두었는데, 아버지는 이 식구들의 부양을 위해 좀더 수입이 나은직장을 찾아 바르샤바로 곧 이주,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프랑스어 교사를 하였고, 어머니는 집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하숙을 쳤다.

이 즈음 쇼팽네는 자주 가정음악회를 열곤 했는데, 어머니 유스티나가 피아노를 칠 때면 아기 쇼팽은 웬일인지울음을 터뜨리고 몸을 떨어 부모들을 당황케 하였다.

 

그러나 그후 좀 더 자랐을 땐 그것이 음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 때문이라는 걸 알고 한동네 사는 예순 살의 술 좋아하는 보이체프 아달 지브니 선생에게 피아노 공부를 시켰다.

어린 쇼팽 피아노에 놀라운 재능을 보이며 자랐다.스카르벡 백작 부인은 이를 사람들에게 자랑하여 귀족 가정에서 초대 연주를 하는가 하면, 신동에 대한 소문이 퍼져 러시아 총독 관저에까지 들어가 그곳에서도 행진곡을 연주하는 일도 있었다.

그가 8세 되던 1818 년 2월 24일엔 자선음악회로 일반 대중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고, 또 그 해엔 <빅토르스카르 백작에게 헌정>이라는 제목의 g단조 폴로네이즈가 출판되어 당시의 바르샤바 신문으로부터 “음악 수준에 있어서 그는 경이로운 천재이다. 

 

부드럽고 우아한 특성을 가졌으며 난곡을 능히 연주할 뿐 아니라 무곡 · 변주곡 작품은 전문 평론가의 눈을 놀라게 했다.

우리도 천재를 낳을 수 있음을 독자들에게 기억시키고자 한다."라는호평까지 받았다.

그 후로 러시아 총독 콘스탄틴 대공은 쇼팽이 작곡한 행진곡을 군악대를 시켜 연주케 하거나, 부관을 보내 2륜마차로 데려다 궁정연주를 시키는 일이 많았다.

 

전문학교와 음악원 시절

13 세가 되자 아버지는 일반 과목 등 전인교육을 위하여 쇼팽을 전문학교(중·고 과정)에 입학시켰다. 이때 그의 집에는 티투스 · 보이체홉스키·보진스키 · 폰타나슬로바키 등을 비롯한 많은 귀족 계급의 자제들이 하숙을 하고 있어 이들과 평생 친구가 된다.

그는 학생 시절에 만화를 잘 그리고 남의 흉내를 잘 내어 친구들을 자주 웃겼다. 그리고 방학 동안엔 시골에 다니면서 폴란드 농민들의 향토색 짙은 축제를 보고 민속연구에 몰두하였다.

15세 때는 알렉산더 1세 앞에서 폴란드 제일의 피아니스트 자격으로 연주를 하여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받았는데, 막상 선물을 받은 쇼팽은 폭군 앞에서의 연주였으므로 명예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1826년에 일반 전문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쇼팽은 대학에 들어갈 것을 포기, 음악전공을 위하여 바르샤바 음악원에 들어갔다. 

 

이 음악원에서는 주도 면밀하고엄격한 교육으로 학생들에게 실력을 쌓게 하였는데, 쇼팽은 여기에서도 음악원의 원장이며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인 유능한 엘스너 선생을 만나 특별지도를 받는 행운을 잡았다.

쇼팽은 작곡한 작품을 엘스너에게 가지고 가서 친절한 지도를 받으며 모든 작곡 이론을 마스터하게 되었다. 

쇼팽이 학교에서 음악수업을 열중하던 때는 낭만주의가신사조로써 떠오른 때이므로 그는 브로진스키 등과 사귀며 신사상을 탐닉하는가 하면, 니콜라이 1세가 대관식을 위해 바르샤바에 왔을 때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가 와서 악마적 기교로 연주하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아 피아노 연습에 더 열을 올리기도 했다.

또 이즈음의 쇼팽은 외국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첫여행은 아버지의 친구인 바르샤바대학 동물학 교수 펠리스아로키와의 동행으로 1828년 9월에 베를린에 갔었는데, 그곳에서 음악 행사가 풍성히 열리고 있어 많은 음악을 듣고 감동을 받았으며, 두 번째 여행은 친구들과 같이 1829년 7월 31일에 빈에 갔었는데 이곳은 베를린보다 더 좋아 보였고, 허슬링거란 출판업자를 찾아 악보출판계약을 맺었을 뿐 아니라 그의 주선으로 커트넬 극장지배인을 만나 그로부터 피아노 연주를 간곡히 요청받았다.

피아노 독주회는 대성황을 이루었고 다음날 신문들은극찬하는 기사들을 일제히 실었다. 그리고 각계의 명사들이 잇따라 찾아왔고 다시 한번 연주해 줄 것을 요청해 와일주일 후 두 번째 연주를 가졌다.

빈에서 성공하고 돌아온 쇼팽은 음악인으로서 뜻을 펴기 위해서는 좁은 바르샤바보다는 음악시장이 큰 대도시에서 활동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당시의 폴란드가 정정(政情)이 너무 불안하여 시시각각 신변에 위험이 느껴지므로 일단 외국으로 몸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망명을 계획하게 되었다.

쇼팽은 망명에 앞서 고별연주회를 가졌다. 1830년 10월 10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이 공개 고별연주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개최 30 일 전에 벌써 입장권이 매진될 정도였다. 따라서 단 한 번으로 그치려던 연주회는 청중들의 성화로 5일 후에 다시 열렸고, 또 그 후에도 한번 더 열릴 수밖에 없었다.

모국을 떠나는 쇼팽에게는 차마 발걸음이 안 떨어지는사연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사랑하는 콘스탄티아를 두고 가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그보다도 더 사랑하는 조국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도 못 본 채 떠나야 하는 것이었다.

쇼팽은 바르샤바 음악원 성악과 학생인 콘스탄티아 글라도코프스카를 마음속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첫사랑은 작품에도 영향을 주어 피아노 협주곡 f단조아다지오 및 왈츠 D장조 (op.70, no.30 작곡하게 했던 것이다.

당시 폴란드는 프로이센 · 오스트리음대로 강압에 의해 나누어 가짐으로 태였고, 바르샤바는 러시아가 콘스탄위임하여 통치하고 있는 중에 독립을 가 움터 있어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쇼팽이 바르샤바를 떠나는 날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연도에 나와 환송을 해주었다. 그리고 친구들은 폴란드를영원히 기억하라는 뜻으로 폴란드 흙이 담긴 커다란 은배를 선물하였다. 

 

이 선물이야말로 이로부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타국에서 방황하게 되는 쇼팽에게 큰 위안이되어 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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