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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생활력 강한 악성 베토벤

by 로사샘 2023.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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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토벤의 생애1  

 

생활력이 강한 악성

베토벤은 빈에서 꿈을 펼치며 일생을 마칠 때까지 경제적으로 그다지 큰 어려움을 겪지 아니하였다. 모차르트가 굶주리며 고통당하던 그 자리에서 베토벤은 굶주림은커녕 아버지를 여읜 동생 칼과 요한까지도 데려다 학업을 마치도록 하고 자립할 터전까지 마련해 주었다. 그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했을까? 거기에 그의 기질이 있고 시대 상황이 있다.

그는 우선 유력 인사들로부터 교묘하게 후원을 받아냈다. 그러면 그 후원자들부터 알아보자.

① 발트시타인 백작 -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베토벤이 본에서 유학할 수 있도록 힘써 준 사람이다. 그는 빈 사교계에서도 거물로 통해 그의 영향권에 속한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베토벤은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1805년 출판된 op.53의 피아노 소나타 C장조를 백작에게 바쳤다.

베토벤과 교우가 있던 문호 괴테 괴테가 이탈리아에 머무를 때티슈바인이 그린 것이다.

베토벤의 스승 하이든 베토벤은 하이든에게서 1년 동안 작곡을 배웠으나 교수방법에 있어 만족지 않았다

오늘날 <발트시타인 소나타>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② 칼 폰 리히노브스키 후작 - 후작은 부인 크리스티아네와 함께 빈에서 초기에 열렬한 후원자였다. 베토벤은 한때 후작의 저택에 살면서 초기의 많은 작품을 작곡해 바치고(op.1의 세 개의 피아노 3 중주곡, op.13의 “비창소나타 C단조), op.26의 <피아노 소나타 A장조) 등) 많은 작품을 후작의 살롱에서 초연하였다.

③ 라주모브스키 백작 - 1792년부터 러시아의 오스트리아 주재대사로 빈에 머물면서 리히노브스키 후작 부인의 언니를 아내로 삼은 사람인데, 초기부터 중기까지 열렬히 후원해 주었다. 백작은 자택에 현악 4중 주단을 두고 자신이 직접 연주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op.59의 3개의 현악 4 중주곡은 백작에게 바친 곡으로 오늘날 <라주모브스키4중주곡>이라고 불린다.

 


④ 요한 요제프 라이너 루돌프 대공 - 황제 레오폴트 2세의 막내아들로 몸이 허약하나 훗날 대사교(司敎)가 된 사람으로 베토벤의 평생 친구이자 작곡의 제자였다.

 

그에게 바친 곡은 매우 많으며 피아노 소나타로서는 op.81a의 고별 소나타>가 유명하다. 이 소나타는 1809년 5월 프랑스 군대가 루돌프를 포함한 황실 가족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빈으로 진군하였을 때 그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작곡한 감동적인 곡이다.

그 외에도 로크포비츠 후작, 킨스키 후작 등에게서도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았다.

이들과의 인연을 맺게 된 동기는, 처음에 공개 자선음악회에 참가하여 비르투오소(Virtuoso) 로서의 실력을 과시하였다가 권력과 재력을 가진 사람들의 눈에 들어 그들이 주최하는 연주회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사실 베토벤은 일방적인 수혜만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시켜 주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고 없던 당시엔 피아노 주자로서베토벤에 필적할 만한 상대가 없어 모두가 존경하고 교우하기를 원했는데, 베토벤은 유력 인사들과 교우하면서 그들에게 작곡이나 피아노를 가르치기도 하고 작품을 헌정하여 명예욕을 충족시켜 주기도 하였다.

베토벤은 경제 관념이 철저한 쁘띠 부르주아 작곡가였다. 음악회 청중들에게 입장권을 팔아 돈을 벌었으며, 작곡료와 출판사에서 주는 저작권 수입을 철저히 챙겼다.

또한 스코틀랜드 민요를 피아노 곡으로 편곡하여 영국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팔기도 하였으며, <엘리제를 위하여> <기쁨의 손으로 잔을 높이 들라> 같은 대중 취향의 소품도 썼다.

그러나 그는 돈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때로는 지나친행동도 서슴지 않을 때가 있었다. 멜첼이 자신의 저작권을 침해했다 하여 법정에 고소를 했는가 하면, 오히려 자신은 같은 작품을 여러 출판사에 팔아넘겨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보나파르트베토벤은 나폴레옹을 위해 <영웅> 교향곡을 작곡했으나 그 가황제의 제위에 오르고 빈을 침공하자분개했다

베토벤이 생존하던 시기의 유럽은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일대 변혁기였다. 프랑스 대혁명(1789) 이 일어나부르주아지가 절대주의 왕정을 몰락시키고 공화제를 실시한 시기이며, 나폴레옹 전쟁 (1799~1814)의 와중에서 빈도 프랑스 군의 점령으로 왕족과 귀족이 헝가리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이다.

베토벤은 인권적 차원에서 민주주의를 신봉했고 그래서프랑스 혁명에 마음속 깊이 동조, 자신의 사회적 이상을 <영웅> 교향곡과 <운명> 교향곡, 그리고 서곡 코리올란><피델리오>에 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이율 배반적으로 귀족들에게 의존하여 후원을 받은 것은 아마도 그에게 대중적인 팬(fan)이 생기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는 바하처럼 어느 누구에게 예속되어 직무상 작곡을 하거나 연주를 하는 일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대등한 위치에서 주고받은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만큼 시대가 달라져 자유민권 사상이 존중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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