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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쇼팽의 연인, 상드와의 사랑

by 로사샘 2023.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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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사랑 상드

 

상드와의 사랑

리스트가 몇몇 친구들을 초대하여 호텔 드 프랑에서 만찬을 들었다. 그리고 기분 좋게 돌아가던 길이었다. 쇼팽이 함께 걷던 힐러에게 “상드라는 그분 진짜 여자예요? 나는 아무래도 의심이 가요."라고 했고, 상드는 또 함께 걷던 마를 리 아니 부인에게 “쇼팽 씨는 혹시 남장을 한 소녀가 아니에요? 아무래도 남성 같지가 않던데."라고 했다.

쇼팽과 상드는 1836 년 겨울에 처음 만났는데, 서로의 첫인상이 이러했던 것이다. 문학과 음악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쇼팽과 상드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알만큼 유명한 이들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조르즈 상드(Georges Sand)의 본명은 오로르 뒤팽 F(Aurore Dupin)으로, 당시 나이가 쇼핑보다 여섯 살 위인 32세였다.

 

본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그대의 전화대로 부모들이 정혼한 생면부지의 카지비로 뇌 부작과 결혼했지만 그녀는 남편이 잔인하고 방탕하나는로 이혼을 하고, 소설 쓰기에 전념하고 있던 여류작가다.

 

153cm의 무척 작은 키였지만 검은 머리 가 포인 내려오고, 크고 까만 눈이 신비를 담고 있어 두 매력을 느끼게 했다. 그는 언제나 꼭 끼는 바지를 쉽고담배를 즐겨 피우며 큰 스케일, 큰 목소리, 꼭 있는 내용의 대화, 언제 어떤 경우를 닥치더라도 결코 당황하지 않는 대담성이 남자들도 따라가기 힘든 여성이었다.

여기에 비해 쇼팽은 170cm의 키에 13kg의 가는매하고, 희고 고운 피부와 귀족들과의 접촉에서 닦은 제련된 매너, 가라앉은 낮은 음성, 다감하고 섬세한 감정등이 꼭 수줍은 소녀와 같았다.

이해 12월 13일에는 쇼팽도 리스트에 대한 보답으로같은 사람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이날 상태는 쇼팽의  피아노 연주에 취해 완전히 넋이 나갔다. 

 

꿈속을 헤매는 듯 황홀해했다. 일단 마음이 쏠린 상드는 어떻게든 쇼팽과 가까워지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나 쇼팽은 그렇지 않았다. 다음 봄 상드가노앙으로 초대한 호의를 무참히도 거절했고, 두 번째의 12 연습곡집의 완성과 마주르카, 왈츠 등의 작곡에만 열중했다.

그러나 한해가 지나고 여름이 되면서 상드가 움직이는 곳에는 언제나 그림자처럼 쇼팽이 따라다니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상드 군과 쇼팽 양이 밀회를 한다."“남자 같은 여자와 여자 같은 남자가 조화를 이루었다."고들 했다.

이러한 두 사람이 파리에서 함께 사라진 것은 1838년 10월 20일경이었다. 파리 사람들에겐 이 두 사람이 어딘가로 잠적했다는 사실이 큰 화젯거리로 등장했다. 

 

상드는 그의 소설 <앵디아나> <콩쉬엘로> <마의 늪> 등이 연달아 히트되면서 여류작가로 명사의 대열에 올랐고, 쇼팽 역시 정상을 달리는 피아니스트였으므로 두 사람의 개성과도 관련, 화제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파리에서 아주 먼 스페인의 앞바다 발레아르군도 마요르카 섬에 있었다. 상드의 두 자녀와 함께였다. 마요르카 섬이란 어떤 곳인가. 쇼팽은 그해 11일 5일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그리고 있다. 지상낙원이라 했다.

그러나 쇼팽에게 지상낙원으로 비쳤던 마요르카는 3주일이 지나고부터는 지옥으로 변하였다. 우기가 닥쳐온 것이다. 

 

폭우가 두달 간이나 계속되면서 모든 것을 물 먹이고, 굴뚝 없는 화로가 연기를 내뿜어 사람을 질식시키게 만들었다. 쇼팽은 더운 곳에서 감기에 걸려 병을 더욱 악화시켰다. 기침을 하며 피를 쏟았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어려운 것은 주민들의 배척이었다. 나병과 폐병은 전염성이 강한 불치병으로 간주되던 때였으므로 돌을 던지며 쫓아내는 것이었다. 

 

쇼팽 일행은 하는 수 없이 폐지된 수도원으로 쫓겨갔다가 간신히 39년 2월 11일, 구름과 안개로 뒤덮인 그곳을 떠나 바르셀로나 - 마르세이유 - 제노바를 거쳐 39년 5월 22일 노앙에 도착했다.

쇼팽은 그때 폐를 앓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앓아왔으므로 새삼스럽지는 않았으나 지난 1835 년 카를스바트를 다녀오면서 각혈을 시작, 이즈음엔 그것의 횟수가 너무 잦아 건강에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돌아올때에는 도시의 호텔들이 병균의 간염을 우려, 가구를 모두 불태우고 배상을 요구하는 바람 많은 비용이 지출되기도 했다.

 


영국 여행을 마지막으로

1848년의 프랑스 혁명은 쇼팽의 많은 제자들을 흩어지게 했다. 그들은 대부분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갔다. 제자 중 스털링과 그녀의 언니 어스킨은 쇼팽더러 아주영국에 와서 살거나 그네들의 고향인 스코틀랜드에 와서 살자고 권유했다.

상드와의 관계로 언짢아 있던 쇼팽은 차제에 영국 여행을 하면서 눌러 살 곳을 생각해 보기로 하고, 그해 4월 20일 영국을 향하여 떠났다.

런던에서 몇번의 연주회를 가진 후 7월에 기차를 타고스코틀랜드에 갔었고 그곳에서 몇 번의 연주가 있은 후 10월 31일 다시 런던으로 왔다가 11월 23일 런던을 출발, 파리로 서둘러 돌아오고 말았다.

여행지의 기후는 그에게 치명상을 주었다. 안개와 추위가 그의 건강을 몹시 상하게 만들었다. 7개월에 걸친 61차례의 이동도 무리였다. 신체 내의 모든 원기를 소진시켜 그를 시체나 다름없이 만들었다.

들라크르와는 거의 매일같이 병문안을 와서 쾌유를 빌었지만, 쇼팽은 한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1년이 다가와 도일 어나지 못하고, 끝내 1849년 10월 17일 새벽 3시에 영원히 잠들었다.

3일 뒤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크뤼베여 박사의 집도로심장을 떼어내 바르샤바의 성 십자교회에 보내져 기둥 안에 안치되고, 시체엔 방부제를 처리, 옷을 입힌 후 꽃으로 둘러싸 침상에 눕혀 조객들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장례는 사망 후 13일 만인 10월 30일 마드렌느 성당에서 거행했다. 검은 예복을 입은 3천 명이 성당을 메운가운데 엄숙히 거행되었으며,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물론 은배에 담아 가지고 온 조국의 흙 한 줌과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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