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앙의 추억
노앙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꽃으로 구름을 이룬 동산 앞에 싱그러운 전원이 펼쳐져 있고 늙은 고목나무 그늘아래 커다란 별장이 있는데, 별장에는 산책할 때나 나들이할 때 필요한 쌍두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별장 내부는 넓은 홀과 작은 인형극장과 호화로운 가구들이 갖춰져 있어 불편함이 전혀 없다.
쇼팽은 이곳에서 한여름 동안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요양과 더불어 작곡을 하다가, 건강상 해로운 찬바람이 불어오는 늦가을인 11월쯤 되면 파리로 들어가 겨울을 나는 생활을 계속했다. 1년, 2년, 3년, 그리고 그다음 해에도.
쇼팽은 상드와 함께 생활하면서 상드에게 "상드 여사""주인마님"이라고 불렀고, 상드는 쇼팽을 부드럽고 다정스럽게 '숍(Chop), 쉽(Chip), 쉬페트(Chipette), 쇼핀스키(Chopinski)' 등으로 불렀다.
상드는 이 집주인으로서, 어머니로서 가정을 다 스리 고 생활비를 조달했다.
쇼팽은 마음과 몸이 함께 편안했다.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산보를 하고 명상에 잠겼다가, 점심을 혼자 방에서 차려 먹고 작품 구상을 하다가 거실로 내려와 상드와 두 아이들과 같이, 또는 방문객들과 같이 즐겁게 저녁식사를 하였다.
그러고 나서 쇼팽은 피아노를 치고 상도는 뜨개질을 하며 음악을 감상하고, 이렇게 얼마 동안 머리를 시킨 다음 각자 할 일을 찾아 제자리로 간다.
이층으로 올라가면 서재가 있고, 서재 양편에 상의방과 쇼팽의 방이 있다. 쇼팽도 밤늦게 작곡하는 습관이 있지만, 상드는 언제나 자정이 넘도록 팬을 달렸다.
상드는 지칠 줄 모르는 여성이었다.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20여 권의 소설·수필·자서전 등을 쓰느라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여행 중에도 밖에 방문을 걸어 잠그고 하루 8시간 이상씩 잡지사에 기고할 원고를 썼다.
쇼팽도 점차 건강이 회복되면서 폴로네즈. 마주르카, 녹턴, 스케르초 등 많은 곡을 첨가하지만, 파리에서 겨울을 보내는 동안은 거의 작곡을 하지 않고 악상이 떠오르면 메모만 해두고 노앙에 와서 작곡을 하였다.
겨울에 파리에서는 집에서 주로 헨슨을 하였다.
파리에서도 쇼팽과 상드는 한집에서 살고 있었다. 다만 상드의 의견에 따라 집안에 큰 정원이 있는 집을 세 들어 정원 건너로 마주 보이도록 방을 정했고 식사는 함께 했다.
애정의 파국
쇼팽과 상드의 이런 관계는 9년 지속되다가 1874년 가을에 끝이 났다. 두 사람이 이런 생활의 권태를 느낀 게 가장 큰 원인이지만, 직접적인 동기는 이러했다.
상드의 아들인 23세의 모리스는 상드의 편이나, 18세의 딸인 솔랑주는 어머니보다 쇼팽을 더 따랐다. 쇼팽은 솔랑주에게 피아노도 가르쳐 주고 산보도 함께 하며 귀여워했다.
그런 솔랑주를 성격이 거칠고 알코올중독에 빚투성이인 조각가와 결혼시키려 하자 쇼팽은 반대를 했다.
여기에 대해 상드는 귀찮게 생각하고 아들모리스만 쇼팽 몰래 노앙으로 부른 후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쇼팽의 친구들에게 쇼팽은 사리를 정확하게 판단할 할 능력이 없고, 인간의 본성을 모르며, 게다가 나에게 내 아이들로부터의 위임과 모든 사랑을 잃게 했다."라고 험담을 하고 다녀 여기에 쇼팽이 항의하자. 드디어 절교의 편지를 보내왔다.
사랑의 해석
쇼팽과 상도의 관계에 대하여 당시의 풍문이나 주위 사들의 봄, 그리고 전기작가들의 견해가 모두 나르다.
그것은 주로 여자이면서 남자처럼 능동적인 행동을 취했던 산드에 관련된 해석이었다. 그녀를 악마 들린 여자' 또는"새로운 육체를 찾는 식인(人)" "소동" 등으로 매도하고 "쇼팽이 거미줄에 걸린 가련한 곤충이었다"면서 비난하는 측이 있는가 하면, 그들의 사랑은 순수하고 숭고하고 고귀했다고 찬미하는 사람도 있다.
쇼팽은 말이 없이 갔고, 놀라크르와는 "약력과 미덕을 함께 갖춘 여자”라고 했을 뿐인데, 상도 자신은 무슨 말로 설명했는가.
"나는 순교자다. 쇼팽을 절대적인 순결과 모성애로써 사랑했다." "나는 쇼팽에 대하여 우정 이외의 어떤 것도 갖지 않았다." "나는 그와 더불어 그리고 다른 사람과 도마치 처녀처럼 살아왔다. 어떤 사람은 내가 격렬한 관능으로 그를 소진시켰다고 비난하지만, 그렇다면 그는 진즉 죽지 않았을까."라고 상드는 쇼팽과의 관계를 해명했다.
실제로 쇼팽은 어떤 여성들과의 관계에서도 단순한 애정에서 육체적 접촉으로 들이는 것에 대하여 혐오감을 느끼며, 항상 그런 기회를 하라고 하였다.
상드는 남편과 이혼한 이후 이 쇼팽이 첫 남성이 아니었다. 당시 동서생활 중 비유를 포함하여 5명이 거쳐 갔다.
그런 상드가 허다한 사람을 다 물리치고 자신이 표현한 대로 "나는 아직까지 결핵에 걸린 남자를 가져 본 적이 없다. 맙소사, 얼마나 오싹할 일인가!"라는 쇼팽을 9년 동안이나 공을 들인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해답은 상드가 굴치말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굴치말라는 쇼팽의 고향 사람으로 쇼팽을 아들처럼 돌보고 있었는데, 상드는 이 사람에게 쇼팽을 설득하여 자신에게 오도록 해달라는 편지를 낸 것이다.
이 편지는 내용이 매우 긴 편지로 쇼팽이 전 애인과 별다른 관계가 아니면 자신에게 와서 간호를 받도록 말해줄 것과,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쇼팽의 건강을 물론작품활동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는 내용이 누누이 강조되어 있다.
실제로 쇼팽은 상드의 간호를 받은 9년 동안이 가장건강했고 행복했으며 작품도 많이 쓸 수 있었다.
그가 쇼팽의 건강을 위하여 얼마나 헌신적이었는가는 그가 집을 비웠을 때 가정부인 마리아니 부인에게 지시한 편지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의 방은 환기를 잘 시켜야 해요. 화장실엔 뜨거운 물이 나와야 하고, 아침엔 초콜릿이 준비되어 있도록 하고, 오후엔 신선한 고기 수프로 하고, 무엇보다 그가 너무 늦게 잠자리에 들지 않도록해주세요. 지금은 건강이 좋은 편이므로 단지 잘 먹고 잘 자기만 하면 돼요. 만약 그가 앓게 되면 나는 모든 일을 뿌리치고 그를 간호하러 가겠어요. 설사 그가 변덕을 부리더라도 그 대신 나를 꾸짖어 주세요."
상드는 쇼팽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1849년 9월 1일, 쇼팽을 간호하고 있던 쇼팽의 누님 루드비카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이 파리에 와 계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침내 나는 당신으로부터 프리드릭에 대한 진짜 소식을 들을 수 있겠군요. 어떤 사람들은 그가 전보다 훨씬 나빠졌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또 내가 늘 보아 온 것처럼 단순히 허약해 앓고 있다고만 말하니, 다만 한마디라도 내게 편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노앙에서 조르즈 상드
이에 대한 답장은 쇼팽의 의사(思)에 따라 써지지 않았다.
이러함에도 그녀에 대한 세간의 악평은 주로 그가 주장하는 여권주의(女權)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그녀는 여성이 침묵하고 있던 시대에 여성의 목소리 역할을 했었다.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가장 폭넓은 영향을 끼 친여성의 목소리였다.
"남성이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봉사 요구는 부부의 행복을 깨뜨린다.” “부부의 행복은 자유 가운데서만 찾을 수 있다." "결혼으로 인해 상실된 여성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 "간통죄는 폐지되어야 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일탈할 수 있는 자유도 인정되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은 뭇 남성들의 혐오를 샀다.
그녀는 본성에 있어서 인도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경향이 있어 사회운동에 참여했고, 또한 공화주의를 신봉하여 혁명에 뛰어들기도 했었다. 선각자적인 여권운동, 자유연애사상을 몸소 실천하면 도덕적으로 지탄받은 것은 억울한 일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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