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과 시민사회
고독한 거인', 이것은 베토벤을 가리킬 때 곧잘 쓰이는 말이지만 사실상의 생활에서 그는 결코 고독한 사람은 아녔습니다.
빈에서는 그의 작품이 크게 환영받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도 존경받았읍니다. 그리고 그는 천성적으로 사람을 싫어하는 성품도 아녔습니다.
“<전원교향곡> 단 한 곡만으로도 우리 고향에서 열리는 대음악회 시간보다 더 걸린다” 북부 독일에서 활동하는 음악가 레이햐르트 (1752∼1814)는 이렇게 말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원>의 첫공연 때는 역시 베토벤의 제5교향곡 c단조에서의 2악장과 관현악이 따르는 피아노의 대곡
두 가지가 연주되었읍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최대 기록은 아닙니다. 언젠가 베토벤은 자기 작품인 교향곡 제1에서 제4 까지를 하룻밤 사이에 청중에게 연주해 준 일도 있었습니다.
1814년의 한겨울 바이올리니스트인 베임은 빈 교외에 위치한 플라터의 카페 하우스에서 베에토벤의 난해한 4 중주곡을 연주했습니다. 청중들은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 싶은 욕심에서 난방도 안 된 강추위를 참고 견뎠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베에토벤의 음악은 그의 생전부터 빈에서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가 시민을 위한 공개 연주회를 자주 가졌던 점입니다.
빈에 도착 3년째부터 그는 이미 부르크 극장에서 개최되는 빈 음악 아카데미 음악회에 피아니스트로 출연했습니다.
이 빈 음악협회의 아카데미는 1772년에 처음 개최되어 독일에서의 첫 공개연주회로 알려지고 있읍니다. 즉 직업 연주가에 의해연주되고 입장료만 내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근대적 공개 연주회는 이렇게 시작되었던 셈입니다.
또한 현악 4중주와 같은 실내악조차도 공개연주가 처음으로 시작된 곳은 빈이었읍니다. 베토벤의 곡들은 이러한 연주회에서도 즐겨 연주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음악은 빈에서 처음부터 대단한 인기를 얻었고 작품들은 대량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빈 자선 아카데미에서는 일반에게 사랑받는 곡만 골라 연주하였는데, 언제나 베토벤의 서곡 하나는 꼭 끼는 것이 관례처럼 되고 있었읍니다.
또한 베에토벤의 친구들은 그의 음악을 열렬히 지지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그의 음악을 이해시키고 보급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빈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슈팡찌히 (1776~1830) 같은 사람은 평생을 베토벤 4 중주곡 연주에 바쳤고, 피아니스트 카알 체르니 (1791~1857) 는 1817 년부터 19년까지 일요 음악회에서는 으레 베토벤의 피아노 곡만을 연주하곤 했습니다.
이것은 글룩(1714∼1787), 하이든, 모차르트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고, 베토벤에 대한 당시의 빈 시민들의 존경심도 일찍이 어느 음악가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깊었습니다.
1819년의 〈빈 음악신문>은 그를 셰익스피어, 괴테와 비교하고 '유럽 최대의 작곡가'로 찬양하면서 “빈은 그를 가지게 된 것을 감사한다"라고 밝혔습니다.
1791년에 모차르트를 공동묘지에 매장했던 빈, 바로 그 빈에서 베토벤의 장례식에는 2만 이상이 참가했던 것입니다.
베토벤은 비록 귀족사회에서 생활했지만 그의 음악은 광범한 사회 계층을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도 그를 가리켜 과도기에 살았던 음악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귀족사회에서 생활했던 점에서는 고전파적이지만 그 음악이 대중에게까지 침투돼 있었다는 점에서는 낭만파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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