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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베토벤과 귀족사회!

by 로사샘 2023.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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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과 귀족사회

본에서 살았을 때 베토벤과 다정한 친구이던 발트시타인 백작의 추천으로 이 젊은 음악가는 빈의 어느 귀족 집에서나 크게 환영받을 수 있었습니다.

 

리히노프스키 후작은 그를 자기 집에서 살도록 허락해 주었고, 라즈모프스키 백작은 자신의 4중 주단 연주용으로 그에게 작곡을 의뢰했는가 하면로프코비츠 공작은 자신의 악단을 그에게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루돌프 대공은 그의 가장 열성과 생도가 되었으며, 베토벤도 진심에서 <하머클라비아 소나타> 작품 106을 대공에게 바치기도 했읍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대공은 베토벤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손수 써서 그에게 준 일도 있었습니다.

 

바로 이 대공이 오르뮤츠의 대주교로 선임되자 이를 계기로 대작 <장엄 미사>가 작곡되었던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1809 년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이 파격적인 호조건으로 자신의 궁정 악장으로 베토벤을 초빙하려 했을 때 루돌프 대공. 로프코비츠 공작, 킨스키 공작 등 세 사람이 연봉 4000그루덴을 평생 지급키로 하고 베에토벤을 빈에 붙잡아두었던 것입니다.

베토벤에 대한 평가는 이를 계기로 크게 높아졌습니다. 이 무렵 빈의 귀족은 누구도 제롬 후작에 대항해서 이 음악가를 혼자 힘으로 고용할 재정적인 능력이 없었습니다.

 

오랜 대불전쟁 은 빈의 귀족들의 경제 사정을 어렵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이든의 시대와는 달리 귀족들도 베토벤 같은 인기있는 음악가를 혼자 힘으로 고용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베에토벤 자신이 어느 특정한 귀족의 비호를 받고자 원했다 해도 쉽게 뜻을 이루지는 못했을 것이며, 자신도 이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자립정신이 이런 생각을 용서하지도 않았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당시의 정세가 그로 하여금 자립정신을 더욱 북돋웠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이든은 이를테면 에스테르하찌 집안의 음악 하인(人)으로서 다른 하인들과 함께 아침마다 주인의 분부를 기다려야 했고, 잘츠부르크의 대주교에게 고용된 모차르트 역시 식사는 하인들 방에서 따로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베토벤은 달랐습니다. 그는 리히노프스키 후작 집에서 지낸 2년 동안 어디까지나 손님으로서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후작은 메데토벤에게는 자기가 가진 최고의 악기를 주었습니다.

 

또한 작품이 나오면 자신이 경비를 대서 악보를 인쇄도록 편의를 제공해 주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만약 자신과 베토벤이 동시에 초인종을 누르면 먼저 베토벤에게로 쫓아가도록 하인들에게 당부할만큼 극진히 대접했읍니다. 

 

베토벤이 방문을 잠그고 작곡 중일 때는 리히노프스키 후작은 다른 하인들과 함께 옆방에서 베에토벤이 작곡을 마치고 방문을 열기를 기다렸습니다.

 

1805년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가 첫 공연에서 신통한 반응을 얻지 못하자 리히노프스키 후자는 뒤에 예술 애호가, 귀족 등을 초대한 자리에서 이 작품을 손질하여 더 좋게 만들어 보도록 베토벤에게 간곡히 권했습니다. 

 

그러나 베토벤은 까닦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빈의 가장 훌륭한 피아니스트기도 한 후작 부인이 메벤 앞에서 '거의 무릎을 꿇다시피' 하고 부탁하는 바람에 그도 어쩔 수 없이 고집을 꺾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언젠가 리히노프스키 후작이 프랑스 장교들 앞에서 연주해 주도록 부탁했을 때는 베토벤도 화난 얼굴로 이렇게 뼈 있는 말로 거절했습니다.

"후작님! 후작님의 신분은 어쩌다 그 집안에 태어났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지만 나의 현재의 지위는 나 자신의 노력으로 이룩한 것입니다. 귀족은 이 세상에 수 천명은 되고 내일도 또 장래에도 존재하겠지요. 그러나 베토벤은 단 하나뿐입니다."

또 한 번은 베토벤의 자리가 신분이 낮은 손님의 식탁 사이에 마련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같으면 참고 그 자리에 눌러 있었겠지만 베토벤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마침 그 자리에 동석했다가 그 광경을 목격했던 프러시아의 루이 페르디난도 공작이 그날 파티의 주빈이었던 한 부인과 베토벤을 동시에 자기 저택으로 초대해서, 이 두 사람을 자신의 양 옆에 앉게 함으로써 지난번의 '결례를 보상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귀족들이 마지못해 베토벤을 이렇듯 각별히 대접했던 것은 아닙니다.

"귀족들은 베토벤을 음악가로서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존경했고, 정신적인 면에서도 다른 어느 음악가보다 뛰어난 그의 인격을 믿어 의심치 않았읍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신분을 떠나 베에토벤을 진정한 우정으로 대했던 것이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은 테프리쯔라는 곳에서 베토벤과 괴테가 산책 중에 있었다는 한 에피소드입니다. 두 사람이 지나가는데 마침 황제의 행차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이때 괴테는 경의를 표하고 길을 비켜섰지만 베토벤은 계속 팔짱을 낀 채 행차의 한복판으로 지나갔고 오히려 황제 쪽에서 먼저 아는 체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아무래도 좀 과장된 듯 합니다.

 

왜냐면 본에서 살았던 소년 시절부터 귀족들과 접촉이 찾아 그만한 예의쯤은 지킬 줄도 알았고 또 급한 성미에 무례하게 행동하는 수도 있었으나 이렇게 노골적으로 귀족계급을 무시하는 성품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가 비록 민주적인 사상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몰상식한 행동을 할 만큼 예의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베토벤은 귀족들과 곧잘 어울렸고 자기 자신도 그런 사회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생활했습니다. 그가 다음에 사교계와 담을 쌓게 되었던 이유는 오직 한 가지 귀가 안 들리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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