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생활
베토벤의 시대
베에토벤은 1770년에 태어나 1827년에 사망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유럽에서 일어났던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이라면 뭐니 해도 프랑스혁명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1789년부터 시작된 이 혁명으로 프랑스는 신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으나 독일, 오스트리아에선 아직 봉건제도가 무너지지 않고 있었읍니다.
이러한 국가에서는 모든 것이 엄격한 사회적 계급제도에 의해 지배됐고 음악, 오페라, 무용 같은 예술도 모두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베토벤은 그의 일생을 대체로 이 귀족사회 안에서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프랑스에 인접한 나라들이 이 혁명사상으로부터 어떤 영향이든 받지 않았던 것은 아녔습니다. 구세력은 이 혁명사상을 막아보고자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나 혁명의 영향력은 베에토벤이 자라던 라인 강변의 본과, 그가 청년 시절 이후의 생애를 보낸 빈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에 비하면 1792년부터 베에토벤이 정착하게 된 빈은 완전히 보수적인 도시였습니다. 위에서 말한 본의 영주 막시밀리안 프란의 형 요제프 2세(1790 년까지 재위)는 빈에서 계몽군주로서 정치적 개혁을 단행하기도 했으나 베토벤이 빈에 살게 됐을 무렵에는 이 황제도 별세, 진보적 기운은 찾아볼 수 없게 돼 있었습니다.
베토벤이 자란 본은 프랑스의 국경에도 가까워 상당히 자유로운 공기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1784 년 이래 이 고장을 통치하던 막시밀리안 프란쯔는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의 동생이었읍니다.
이 요제프 2세는 빈 제일의 계몽군주 (啓蒙君로 유명했지만 그의 동생 막시밀리안 프란쯔는 형보다 더 진보적이었고 '계몽적인 가톨릭주의자'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신사상에 물든 사람들도 이 본에서만은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고, 본 대학 교수 가운데는 과격한 혁명주의자 오이로 기우스 시나이더와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베토벤은 바로 이 시나이더의 강의를 통해 프랑스의 혁명사상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베토벤이 그의 전 생애를 통해 민주주의적인 사상을 계속 지켰던 것도 바로 이 시나이더의 영향이 컸습니다.
이에 비하면 1792년부터 베토벤이 정착하게 된 빈은 완전히 보수적인 도시였읍니다.
위에서 말한 본의 영주 막시밀리안 프란의 형 요제프 2세(1790 년까지 재위)는 빈에서 계몽군주로서 정치적 개혁을 단행하기도 했으나 베에토벤이 빈에 살게 됐을 무렵에는 이 황제도 별세, 진보적 기운은 찾아볼 수 없게 돼 있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비록 유럽 제1의 대국(大國)이었고 수도 빈은 번영을 자랑하고 있었으나 자유해방을 부르짖는 민중 소리는 이 보수의 아성(牙城)을 밑바탕으로부터 뒤흔들어대고 있었습니다.
특히 베토벤이 살던 30여 년은 이 도시가 나폴레옹과의 싸움에 계속 시달리던 시대였습니다.
1797년,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서 빈 가까이까지 쳐들어갔고, 1805년에는 빈이 끝내 2개월 동안 프랑스 군에게 점령당하여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빈 교외의 쇤브룬 궁(宮)을 점령당함으로써 황제 프란쯔는 1806년 프레스부르크의 굴욕적인 강화에 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전쟁이 발발, 빈 시가는 집중 포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오스트리아 군은 3만의 전사자를 내고 말았습니다.
그 후 1811년부터 오스트리아 정부는 전후의 경제 재건을 위해 재정 긴축정책을 퍼는 한편 정치 면에서는 메테르니히의 철저한 보수반동 정책이 강행되었습니다.
이 반동체제는 몇 번의 고비를 겪으면서도 베토벤의 사망 후 1830년까지 계속됩니다.
1814년의 빈 회의는 이러한 보수파의 일시적인 승리이기도 했읍니다.
베에토벤 음악의 특색인 격렬한 힘이나 감정 등은 이 구체제하의 베에토벤의 산물은 아닙니다. 이것이 베에토벤 자신의 성격의 반영인 점은 틀림없으나 또 한편 그것은 새로운 시대의 산물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프랑스에 재빠르게 혁명이 되어 나타난 정신이었습니다. 베토벤은 사상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혁명에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가 존경하던 프랑스 혁명시절의 작곡가들, 케루 비니 (1760~1842). 메뉴르 (17631817), 그레트리 (1741~1813) 등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읍니다.
그리고 베에토벤의 음악에서 들을 수 있는 그 외지적인 투쟁정신은 이 새로운 사상인 음악에서 이어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베토벤은 빈의 음악의 전통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읍니다. 하이든 (1732-1809).모짜르트 (1756-1791) 의 음악적 유산을 계승할 수 있는 사람은 베에토벤 밖에 없었읍니다.
베에토벤은 이 두 선배가 이루어 놓은 경지에서부터 출발하여 그들이 이루어 놓은 것을 충실하게 계승해 나갔습니다.
그는 음악 형식이나 기교면에서는 오히려 보수적이었지만 다만 거기에 표현된 격렬한 의지와 고귀한 정신 면에서는 혁명적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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