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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러시아 국민악파의 거두 림스키=코르사코프 !

by 로사샘 2023.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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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살탄의 이야기'의 무대의 한 장면

림스키-코르사코프는 1844년 3월 18일 러시아의 노브고로드 지방에 속해 있는 치프빈에서 태어나, 1908년 6월 21일 역시 러시아의 류벤스코에서 64세로 세상을 떠난 러시아의 근대 민족주의 작곡가입니다.

러시아 음악 사상 찬연한 빛을 남긴 이른바, 러시아 국민악파 5인조, 즉 군인과 관사를 지낸 무소르그스키, 육군 장교인 큐이, 의사인 보로딘, 그리고 단 한 사람 직업적인 전문가 발라키레프, 여기에 해군 장교인 림스키-코르사코프 등, 러시아 민족주의 깃발을 들고 나온 대담한 혁신파의 모임 중에서도 가장 어린 나이로 참여했고, 동시에 근대 러시아 음악의 전통을 확립하는 데 누구보다도 많은 공헌을 한 사람이 립스코르사코프입니다.

 

이 사람은 국민악파 중에서도 지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서, 뛰어난 이론가인 동시에 작곡 기교로서, 그리고 <관현악법 원리>라는 고금을 통한 명저도 남겼고, 근대 관현악법의 대가로서 당시에는 관현악의 마술사라고까지 불리어졌던 천재입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작곡가뿐 아니라 교육가로서도 영향을 주어, 그 문하에서는 글라주노프, 리야도프, 입포리도프=이와노프, 체레프닝, 다니에프, 프로코피에프, 미야스코프키, 스트라빈스키, 그리고 이탈리아의 레스피기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근대, 현대를 주름 잡는 거장들이 배출되었습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6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서 그 기술이 놀랄 만큼 발전했고, 9살 때에는 작곡을 할 만큼 되었다고 하지만, 그는 장차 음악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의 형처럼 해군장교가 되기 위해 12살 때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이 사관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피아노 공부는 계속하였습니다. 

 

그가 음악가로 전환하게 된 동기는 민족 음악의 선구자 글린카의 가극에서 받은 감동과 그리고 피아노 선생인 카네이르의 소개로 1861년 발라키레프를 비롯한 5인조의 클럽을 알게 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때의 나이는 17살로 가장 어렸습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사관학교를 졸업하자 사관후보생으로 항해훈련차 훈련함을 타고 세계 일주의 원양 항해를 떠났습니다. 

 

그는 이 항해 중에 <교향곡 제1번>의 작곡에 착수하여 약 3년의 항해를 끝마치고 1865년 귀국하자 이를 완성했습니다. 이것이 러시아 역사상 처음 작곡된 교향곡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어 <셀비아의 주제에 의한 환상곡>이라든가 <시도크의 건설에 의한 에피소드>, <교향곡 제2번 안타르> 등을 작곡했는데, 이는 모두 원양 항해에서 얻은 이국적인 정서가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림스키코르사코프가 후에 이론과 기교의 대가가 된 동기는 1871년 27살 때 당시 아산체프스키라는 사람이 페트로그라드, 지금의 레닌그라드 음악 학교의 교장으로 취임을 하자 림스키-코르사코프를 작곡과 관현악의 교수로 초청한 데서 비롯됩니다. 

 

그는 주위 친구들의 권유로 아무 생각 없이 승낙을 했다가 막상 아카데믹한 학술적인 지도를 해야 할 입장에서 보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는 합창곡에 화성을 붙일 줄도 모르 고, 대위법은 고사하고 푸가의 구조가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 본인도 실토하고 있듯이 자기 자신도 작곡하는 것과는 달리 체계적인 이론을 모르는 엉터리 선생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르치면서 밤을 새워 공부를 한 결과 2, 3년 사이에 놀랄 만큼 지식을 얻어, 5인조 중에서 제1인자가 되었습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1873년 29살 때 최초의 가극 <프스코프의 처녀>를 초연하자 군복을 벗고 직업 음악가로 전념하며. 해군 군악대의 지휘자를 약 11년간 계속 맡았습니다.

 

그는 오페라 15편. 관현악곡 10여 편, 실내악, 가곡, 합창곡, 피아노곡 등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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